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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연금술

좋은 물의 기준: 우리가 마시는 물, 커피에게도 좋은 물일까?

by info20250806 2025.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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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건강을 위해 ‘좋은 물’을 찾아 마십니다. 풍부한 미네랄이 담겨 목 넘김이 부드러운 물, 혹은 특정 지역의 청정함을 내세우는 프리미엄 생수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합니다. 이렇게 우리 몸을 위해 신중하게 고른 물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사랑하는 커피에게도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커피 맛의 비극은 시작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의 몸에 좋은 물과 커피에 좋은 물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우리가 ‘건강하다’고 믿는 물이 커피의 섬세한 맛과 향을 망가뜨리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글은 ‘좋은 물’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상식을 완전히 뒤집고, 오직 최고의 커피 한 잔을 위해 과학적으로 정의된 ‘좋은 물’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가 마시는 물이 커피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는지 그 이유를 낱낱이 파헤칩니다.

1. 인간의 기준 vs. 커피의 기준: 왜 목표가 다른가

우리가 물을 마시는 목적과 커피가 물을 필요로 하는 목적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에게 물은 생명 유지와 신진대사 촉진, 그리고 필수 미네랄 섭취를 위한 핵심 요소입니다. 따라서 인체에 유익한 칼슘, 마그네슘, 칼륨 등이 풍부하게 함유된 물은 ‘건강한 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는 이 물을 통해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하고 몸의 균형을 맞춥니다. 하지만 커피에게 물은 영양 공급의 대상이 아니라, 원두라는 보물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도구’입니다. 커피의 목적은 물을 통해 원두 세포벽 안에 갇혀 있는 수백 가지의 맛과 향 성분(가용성 고형물)을 가장 효율적이고 균형 있게 이끌어내는, 즉 ‘추출(Extraction)’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물의 역할은 인체에 흡수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화학적 상호작용을 필요로 합니다. 커피는 특정 미네랄을 ‘활용’하여 특정 맛 성분과의 결합을 촉진하고, 또 다른 미네랄을 통해 원치 않는 맛의 발현을 ‘억제’합니다. 따라서 커피에게 ‘좋은 물’이란 단순히 미네랄이 풍부한 물이 아니라, 추출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최적의 화학적 구성을 갖춘 ‘잘 설계된 용매(solvent)’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건강이라는 기준을 커피에 그대로 들이대는 것은, 육상 선수의 훈련법을 수영 선수에게 강요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좋은 물의 기준: 우리가 마시는 물, 커피에게도 좋은 물일까?

2. 커피 물의 세 가지 기둥: 경도, 알칼리도, 그리고 TDS

최고의 커피를 위한 물의 기준은 감성적인 표현이 아닌, 명확한 과학적 지표로 정의됩니다. 그 기준을 떠받치는 세 가지 핵심 기둥은 바로 **경도(Hardness), 알칼리도(Alkalinity), 그리고 TDS(총 용존 고형물)**입니다. 첫째, 경도는 물속에 녹아 있는 칼슘(Ca²⁺)과 마그네슘(Mg²⁺) 이온의 총량을 의미하며, 커피의 긍정적인 맛과 향을 ‘추출하는 힘’과 직결됩니다. 특히 마그네슘은 커피의 과일 풍미나 꽃향기 같은 밝고 화사한 맛 성분을 효과적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칼슘은 무게감과 질감, 즉 바디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합니다. 둘째, 알칼리도는 주로 탄산수소염(HCO₃⁻)에 의해 결정되며, 커피의 산미를 조절하는 ‘완충(buffering)’ 능력을 나타냅니다. 좋은 원두가 가진 상쾌한 산미는 커피의 생동감을 더하는 핵심 요소이지만, 알칼리도라는 완충 장치가 없으면 이 산미는 날카롭고 공격적인 신맛으로 변질됩니다. 알칼리도는 이 산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기분 좋은 맛으로 완성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셋째, TDS는 물에 녹아 있는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의 총량을 ppm 단위로 나타낸 것으로, 물의 전반적인 ‘농도’를 의미합니다. 스페셜티 커피 협회(SCA)에서는 이 세 가지 기둥의 최적 균형점으로 경도 50-175ppm, 알칼리도 40-75ppm, 그리고 TDS 75-250ppm을 권장합니다. 이 수치는 커피의 좋은 성분은 최대한 이끌어내면서도, 물 자체의 맛이 커피를 방해하지 않고, 산미와 다른 맛들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는 ‘골디락스 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몸에 좋은 ‘건강한 물’의 역설: 미네랄 과잉이 부르는 재앙

우리가 건강을 위해 즐겨 찾는 ‘미네랄 워터’가 커피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과유불급’의 원리 때문입니다. 인체에는 유익할지 몰라도, SCA의 권장 범위를 훌쩍 넘어선 과도한 미네랄은 커피 추출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예를 들어, 뼈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칼슘 함량이 극도로 높은 유럽산 경수는 커피에게 최악의 파트너 중 하나입니다. 과도한 칼슘은 커피 성분을 필요 이상으로 추출하여 원두의 섬세한 향미는 모두 덮어버리고, 텁텁하고 거친 질감과 함께 불쾌한 쓴맛만을 남기는 ‘과다추출’을 유발합니다. 또한, 이 칼슘은 열을 만나면 하얀 침전물인 ‘스케일’을 만들어 고가의 커피 머신 보일러와 관을 막히게 하는 주범이 됩니다. 알칼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위산을 중화시키는 효과 때문에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알칼리성 물은, 커피의 가장 중요한 매력 중 하나인 ‘산미’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립니다. 에티오피아 원두의 화사한 과일 산미나 케냐 원두의 톡 쏘는 생동감은 이 높은 알칼리도 앞에서 힘을 잃고, 커피는 아무런 개성도 특징도 없는 밋밋하고 평면적인 음료로 전락하고 맙니다. 결국 ‘몸에 좋은 물’이라는 타이틀은 커피의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건강함의 근원인 ‘풍부한 미네랄’이 커피 본연의 맛을 가리고 왜곡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4. 우리가 마시는 물 해부하기: 수돗물, 정수기, 생수의 진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들은 커피의 기준에서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먼저 수돗물은 지역별로 편차가 매우 크고 수질이 일정하지 않아 안정적인 ‘기준점’이 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소독을 위해 투입된 염소 성분이 커피의 아로마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므로, 최소한 필터로 거르거나 끓여서 식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정수기는 방식에 따라 운명이 갈립니다. 역삼투압(RO) 방식은 미네랄까지 모두 제거한 ‘맹물’을 만들어 커피를 공허하게 만들고, 반면 중공사막이나 나노 필터 방식은 미네랄을 남겨두므로 상대적으로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원수(수돗물)의 상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므로 맹신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생수입니다. 생수는 제품 라벨에 칼슘, 마그네슘, 칼륨, 나트륨 등의 무기물 함량을 의무적으로 표기하고 있어, 소비자가 직접 그 성분을 확인하고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생수를 고를 때 단순히 브랜드나 수원지만 볼 것이 아니라, 뒷면의 ‘무기물 함량 표’를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칼슘과 마그네슘의 총량이 너무 높지 않은지, TDS 수치가 SCA 권장 범위에 근접하는지를 비교하여 내 커피를 위한 최적의 파트너를 찾아내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5. 당신의 컵을 위한 ‘좋은 물’의 재정의: 균형 잡힌 화학적 파트너

결론적으로 커피에게 ‘좋은 물’이란, 인간의 건강이나 청정함의 기준이 아닌, 오직 ‘추출’이라는 화학 반응을 위한 최적의 균형점을 갖춘 파트너를 의미합니다. 이는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물도 아니고, 미네랄이 넘쳐나는 건강한 물도 아닙니다. 커피의 단맛과 향을 잘 이끌어낼 만큼의 적절한 경도, 기분 좋은 산미를 아름답게 완성시킬 만큼의 적절한 알칼리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최적의 농도(TDS)를 갖춘 물입니다. 이제 ‘좋은 물’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수동적으로 주어진 물을 사용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내가 가진 원두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 잠재력을 최고로 이끌어낼 수 있는 물을 능동적으로 찾고, 나아가 직접 설계하는 ‘워터 디자이너’가 되어야 합니다. 그 시작은 지금 당신이 마시는 물의 라벨을 확인하는 작은 습관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 작은 변화가 당신의 커피 맛을 실패에서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위대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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